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서울여행 송파구 국가지정 문화재 소개

by 세계를 날아보자 2023. 6. 20.

서울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송파구내에 많은 문화재와 석촌호수등을 여행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천 년 전 백제의 수도였기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송파구 문화재를 소개드리려 합니다. 백제의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하며 돌아보시면 뜻깊은 시간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송파구 국가 지정문화재 소개

1. 서울풍납토성 

풍납토성 모형도
풍납토성 모형도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삼국시대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백제의 성곽. 토성. 사적으로 흙으로 쌓은 평지성입니다. 풍납토성 또는 풍납동토성이라고도 합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으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성벽이 유실되어 지금은 약 2.7km만 남아 있지만 서벽이 존재하였다면 총둘레의 길이가 약 3.7km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규모는 국내성(둘래 약 2,6km)이나 경주의 월성(둘레 2,4km)보다도 훨씬 크고 웅장합니다. 처음 성벽은 10,8m의 높이였으며 두 차례의 증축을 통해 최대 13,3m가 되는 거대한 성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한강변에 연한 서벽을 제외하고 북벽과 동벽, 남벽 등이 남아있으며 북벽 446m 구간은 이미 복원 정비가 완료되었고 나머지 동벽과 남벽은 국가에서 단계적으로 매입 및 정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 석촌동 고분군

종목 : 사적 제243호

명칭 : 서울 석촌동 고분군

면적 : 49,999

지정일 : 1975. 05. 27

소재기 : 서울 송파구 가락로7길21

석촌동고분군
석촌동고분군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한성기에 만들어진 왕과 귀족의 무덤군입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현재 석촌동과 가락동 일대에 약 300 여기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해방 이후 도시개발 등으로 전체 구역 중 현재 고분군에 해당하는 서쪽 일부만 남아 있으며, 1970년대부터 시작된 발굴조사 결과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 여기 이상 확인되었습니다.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은 지면에서 돌을 계단처럼 쌓은 후 그 위에 매장하는 공간을 조성하였으며, 상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촌동 3호분은 복원 전 너비 50.8m, 높이 4.5m의 사각형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5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 추진된 발굴조사 결과 석촌동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큰 사각형 기단을 중심으로 주변에 다른 무덤을 붙여서 축조하는 연접 돌무지무덤이 확인되었고, 백제 토기와 기와, 금제장식, 금귀걸이, 구슬, 화장된 인골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처럼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한성기 고분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러한 돌무지무덤과 이어 붙인 고분 형태는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에서 확인되는 양식으로, 백제 지배 세력과 고구려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합니다.

3, 서울 방이동 고분군

종목 : 사적 제270호

명칭 : 서울 방이동 고분군

면적 : 30,293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오금로 219

방이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은 낮은 구릉의 능선부에 축조된 삼국시대의 고분군입니다.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합동지표조사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이 중 1975년 잠실지구 신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6기의 고분이 조사되었습니다. 고분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과 돌널무덤으로, 굴식돌방무덤인 1호분의 경우 넓은 돌로 벽을 쌓아 올려 방을 만든 뒤 한쪽에 출입구를 만들고 천장에는 뚜껑돌을 엎은 후 상부에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최근 조사된 3호분은 내부 형태는 동일하나 상부 봉분의 지름이 16m로 기존에 정비되어 있던 봉분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방이동 고분군은 무덤 구조를 근거로 백제의 고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발굴된 고분에서 굽다리접시 등 신라토기 조각이 출토되어 신라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 4, 서울 몽촌토성

종목 : 사적 297호

명칭 : 서울 몽촌토성

면적 : 441,765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

몬촌토성사진
몽촌토성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백제 한성기의 대표적인 토성입니다. 전체 둘레는 2,383m, 내부 면적은 약 216,000㎡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할 수 없는 곳은 흙을 쌓거나 경사면을 만들어 성벽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성벽 바깥으로 성내천이 몽촌토성을 감싸고 흘러 자연스럽게 자연해자 역할을 하였으나, 성내천 개선 공사 등으로 인해 물길이 바뀌면서 지금의 해자를 인공적으로 설치하였습니다. 몽촌토성 일대가 1988 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한 체육시설 조성 공간으로 확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시행되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한성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1만여 점의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건물지와 집터, 독무덤, 저장구덩이 등이 조사되어 백제 왕도의 중심지로 주목받았습니다. 특히 화살촉, 뼈갑옷 등 무기류가 다량 출토되어 군사적 요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2013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 외 고구려와 신라의 도로, 집자리 등이 확인된 점을 볼 때, 백제가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주둔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삼국시대 유구에서 ‘궁(宮)’자명 토기가 확인되어 몽촌토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475년에 고구려군 한성의 북쪽 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해 성이 함락하자 남쪽 성에 있던 백제 개로왕이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잡혀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 기사의 북쪽 성을 지금의 풍납동 토성, 남쪽 성을 몽촌토성으로 보며, 이 두 토성은 백제 한성기 도성 경관 복원에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5, 서울 삼전도비

종목 : 사적 제101호

명칭 : 서울 삼전도비

면적 : 200,09

지정일 : 1963. 01. 21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삼학사로 136

삼전도비사진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입니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되어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습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습니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마치며

송파구내의 국가지정 문화재를 소개드리며 역사적인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역사적인 아픔과 자랑스러운 점 등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송파구의 시지정문화재, 무형문화재, 등록문화재, 출토유물, 송파의 인물, 등 송파구의 역사적인 의미를 계속적으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댓글